그랜드서클 다섯 번째 목적지는 유타 주 남부에 자리한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이었습니다. 페이지 캠핑장에서 153마일(246km)을 달려 도착한 이곳의 기온은 영하 15도에 가까웠습니다. 그랜드서클을 돌며 방문한 국립공원 중 가장 추운 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날은 아내가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았던 곳으로 꼽는 날이 됐습니다.
브라이스캐니언 — 협곡이 아닌 원형 극장
이름에 캐니언(Canyon)이 들어가지만 브라이스캐니언은 강물에 의해 깎인 협곡이 아닙니다. 파운소간트 고원(Paunsaugunt Plateau) 동쪽 가장자리에 만들어진 자연 원형 극장의 집합체입니다. 그랜드캐니언이 콜로라도 강의 침식으로, 앤털로프 캐니언이 몬순 홍수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브라이스캐니언의 후두(Hoodoos)는 전혀 다른 원리로 탄생했습니다.
이곳은 해발 6,000~9,000피트의 높은 고도 탓에 연중 약 200일 동안 기온이 영하와 영상을 오르내립니다. 바위 틈새로 스며든 물이 얼면서 팽창하고, 녹으면서 수축하는 과정이 수백만 년 반복되면서 바위가 쪼개지고 떨어져 나가 지금의 형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빙쐐기 작용(Ice Wedging)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후두는 조금씩 부서지고, 새로운 후두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주니어레인저 프로그램 — 이동 중 학습지를 풀다
브라이스캐니언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그랜드캐니언 방문자 센터에서 받아온 주니어레인저 학습지를 펴 들었습니다. 그랜드캐니언 방문 당일 시간이 부족해 현장에서 완료하지 못했는데, 담당 직원이 배지를 미리 건네주며 학습지를 완성하면 부모가 직접 줘도 된다고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동하며 학습지를 푸는 아이들 덕에 세 시간 운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주니어레인저 프로그램(Junior Ranger Program)은 미국 국립공원 관리공단(NPS)이 1930년대 요세미티에서 처음 시작한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각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에서 무료 학습지를 받아 미션을 완수하면 해당 공원 고유의 배지를 받는 방식으로, 현재 미국 전역 424개 국립공원 시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공식 대상은 5~13세이지만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배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됐고, 브라이스캐니언 방문자 센터에서는 주니어레인저 조끼와 모자도 구매해 아이들이 여행 내내 착용했습니다. 배지와 함께 고유의 포즈와 캐치프레이즈, 심지어 로고송까지 개발한 두 아들의 모습은 이 여행에서 가장 귀여운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썬라이즈 포인트에서 브라이스 포인트까지
방문자 센터에서 학습지와 지도를 받은 뒤 썬라이즈 포인트(Sunrise Point)로 이동했습니다. 포인트에 도착한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온 가족이 말을 잃었습니다. 수천 개의 후두가 원형 극장 형태로 빼곡히 들어찬 풍경은, 어떤 국립공원과도 다른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였습니다.
저희는 썬라이즈 포인트를 시작으로 썬셋 포인트(Sunset Point), 어퍼 인스퍼레이션 포인트(Upper Inspiration Point), 브라이스 포인트(Bryce Point)까지 림 위쪽 산책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각 포인트마다 바라보는 각도와 빛의 방향이 달라, 같은 후두를 보면서도 매번 새로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영하 10도 이하였지만 바람이 없는 맑은 날씨 덕분에 체감온도가 그보다 낮지 않았고, 파란 하늘과 붉은 후두의 대비가 선명했습니다.
브라이스 포인트에 도착하면 리버티 캐슬(Liberty Castle)이라는 광경을 마주합니다. 절벽이 계속해서 깎여 나가는 현장으로, 무너져 내린 바위와 새로 만들어지는 작은 후두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저 후두가 이번 세기의 마지막 후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레일 안내 — 겨울에는 림 위에서만 걷기를
브라이스캐니언에는 후두들 사이를 직접 걸을 수 있는 하이킹 트레일이 여러 개 있습니다. 나바호 루프 트레일(Navajo Loop Trail)은 왕복 2.3km의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토르의 망치(Thor's Hammer) 등 유명 후두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퀸스 가든 트레일(Queen's Garden Trail)은 왕복 2.9km로 가장 쉬운 아래로 내려가는 트레일입니다. 두 트레일을 연결하는 콤비네이션 루프(Combination Loop)는 총 5.6km로 브라이스캐니언 트레일 중 가장 권장되는 코스입니다. 단, 동계에는 트레일 대부분이 눈과 얼음으로 덮여 아이젠이 필수이며, 햇빛이 닿지 않는 협곡 아래는 기온이 더욱 낮아집니다. 저희는 날씨와 아이들 컨디션을 고려해 림 위 산책로만 걷기로 했고,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겨울 브라이스캐니언의 장단점
단점은 분명했습니다. 기온이 낮아 아래 트레일을 즐기기 어렵고, 공원 내 식당과 스낵바가 모두 문을 닫아 식사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희는 국립공원 주차장 한켠에 캠핑카를 세우고 라면을 끓여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캠핑카 안에서 먹는 뜨끈한 라면 한 그릇의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화장실도 동계에는 운영하지 않아 방문 전 미리 해결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면 장점도 뚜렷했습니다. 관광객이 거의 없어 각 포인트를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고, 붐비지 않아 사진 찍기도 수월했습니다. 눈 없이 맑고 건조한 날씨 덕분에 파란 하늘과 붉은 후두의 대비가 선명해 오히려 성수기보다 더 극적인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랜드서클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브라이스캐니언을 꼽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이 풍경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오래 눈에 담아두고 싶은 곳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