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행을 준비하는 6개월 내내 가장 마음을 졸였던 곳이 앤털로프 캐니언이었습니다. 침식이 심각해 내부 보수 공사로 투어가 중단된 상태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홈페이지를 틈틈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딱 이틀 전, 투어 재개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서둘러 예약을 완료했고, 그렇게 못 볼 줄 알았던 앤털로프 캐니언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앤털로프 캐니언 — 나바호 자치국이 관리하는 슬롯 캐니언
앤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은 애리조나 주 페이지(Page) 시티에서 동쪽으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슬롯 캐니언입니다. 나바호 자치국(Navajo Nation) 영토 내에 자리하고 있어 나바호 족이 직접 관리하며, 개인 방문은 허용되지 않고 나바호 족이 운영하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가이드 동행은 의무 사항입니다.
앤털로프 캐니언은 크게 어퍼(Upper)와 로워(Lower) 두 구역으로 나뉩니다. 어퍼 앤털로프 캐니언은 나바호어로 'Tsé bighánílíní', 즉 '물이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곳'을 의미합니다. 입구와 통로가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어 별도의 계단 없이 진입할 수 있어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구역입니다. 로워 앤털로프 캐니언은 여러 층의 계단과 사다리를 통해 내려가는 구조입니다. 저희가 방문했을 당시 로워는 운영하지 않아 어퍼만 투어가 가능했습니다.
협곡은 몬순 시즌 빗물이 좁은 통로로 집중되면서 수백 년에 걸쳐 나바호 사암을 침식해 만들어졌습니다. 물이 흐르듯 매끄럽고 부드러운 곡면이 특징이며, 여름철 오전 11시~1시 사이에는 협곡 상단 개구부에서 직사광선이 내리 꽂히는 빛기둥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 빛기둥은 3월 20일부터 10월 20일 사이에만 관찰할 수 있어 겨울 방문 시에는 볼 수 없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1월에도 빛기둥은 없었지만, 위에서 들어오는 햇빛과 파란 하늘이 붉은 사암과 어우러지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랜드서클 여행 시 반드시 알아야 할 미국 시간대
앤털로프 캐니언 투어에서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시간대와 썸머타임 제도입니다. 미국 본토는 퍼시픽(UTC-8), 마운틴(UTC-7), 센트럴(UTC-6), 이스턴(UTC-5) 네 개 시간대로 나뉩니다. 캘리포니아나 네바다에서 애리조나 주로 넘어올 때 시간대가 UTC-8에서 UTC-7로 변경되어 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집니다. 오전 8시에 도착할 거라 생각했는데 현지는 이미 9시가 된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썸머타임(DST) 제도도 주마다 다르게 적용됩니다. 애리조나 주는 일조량이 풍부해 썸머타임을 시행하지 않지만, 애리조나 주 내에 있는 나바호 자치국은 썸머타임을 시행합니다. 즉 같은 애리조나 주 안에서도 나바호 자치국에 들어가는 순간 시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앤털로프 캐니언 투어처럼 집결 시간이 정해진 예약 투어라면 시간 오차로 인한 노쇼(No Show)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사전에 시간대를 확인해야 합니다. 저희는 1~2월 방문이라 썸머타임 미적용 시기였고, 페이지 시티에 머물고 있어 시간 계산 걱정 없이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은 인터넷을 통해 위성 시간에 맞춰 자동 변경되므로 현지 도착 후 스마트폰 시간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투어 실전 — 가이드가 없으면 절반도 못 봅니다
투어 집결지에 모인 관광객들이 버스에 올라 비포장 사막 도로를 10분 정도 달려 앤털로프 캐니언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도착해서 보면 입구가 어디인지 한참을 찾게 됩니다. 큰 바위 사이 손바닥만 한 구멍이 입구였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좁고 작은 규모에 모두가 의아해했고, 그 안에 저런 풍경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협곡 내부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동합니다. 관광객 눈에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공간이지만, 가이드가 특정 위치에서 특정 방향으로 촬영하도록 안내하면 전혀 다른 사진이 나옵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구간에서는 스마트폰 렌즈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열었다 하는 방식으로 조도를 직접 조절해 가며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전문 사진작가가 아닌 이상 가이드 도움 없이는 이 협곡에서 제대로 된 사진을 건내기 어렵습니다. 앤털로프 캐니언을 유명하게 만든 윈도우즈 배경화면 사진도 이곳에서 촬영된 것으로, 가이드가 직접 해당 스팟을 안내해 줬습니다. 다만 지난여름 몬순으로 인해 협곡 상단에 나뭇가지와 수풀이 끼어 있어 그 포인트의 원래 모습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협곡 내부는 생각보다 상당히 추웠습니다. 둘째와 셋째에게 얇은 점퍼를 입혔더니 투어 내내 추워해서 아내가 아이들 달래느라 제대로 관광을 하지 못했습니다. 1~2월 동계 방문 시에는 반드시 방한 복장을 두툼하게 챙겨 입고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앤털로프 캐니언 투어 예약 방법과 실용 정보
앤털로프 캐니언 투어는 공식 홈페이지(navajotours.com 등 나바호 투어 운영사)에서 예약할 수 있습니다. 성수기에는 몇 주 전에 마감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전 예약이 필수입니다. 어퍼와 로워 투어 운영사가 각각 다르므로 방문하고자 하는 구역의 투어사를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저희가 이용한 어퍼 앤털로프 캐니언 투어 요금은 성인 약 $70, 아동 약 $52였으며 나바호 자치국 입장료 1인당 $8이 별도로 부과됩니다. 총 투어 소요 시간은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입니다.
나바호 자치국 내에서는 알코올 음료와 총기 소지가 엄격히 금지됩니다. 출입 금지 구역에는 절대 진입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나바호 족은 개인 공간을 중시하며 눈 맞춤을 자주 하지 않는 문화가 있으므로 처음 만나는 가이드에게 과도한 스킨십이나 포옹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예의에 맞습니다. 사진 촬영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지정된 구역에서만 가능하며, 협곡 벽면을 손으로 만지는 행위는 침식을 가속시키므로 삼가야 합니다.
투어를 마치고 — 꿈을 꾸고 온 것 같았다
협곡 밖으로 나오는 순간, 출구가 너무 좁고 낮아 보여 저 안에서 우리가 그런 풍경을 보고 왔나 싶었습니다. 투어를 마치면 협곡 위쪽으로 올라가 아까 통과했던 좁은 협곡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보면 붉은 땅 위에 가느다란 틈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그런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 붉은 협곡이 여름 우기마다 물에 잠기고, 물이 빠지면 다시 사암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수백 년 반복해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오전 투어를 마치고 페이지 캠핑장으로 돌아와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며 15일 차를 마무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