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륙횡단 캠핑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가장 기대했던 날이었습니다. 페이지 캠핑장에서 일찍 출발해 그랜드캐니언까지 130마일(209km)을 달렸습니다. 구경을 마치고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왕복 일정이라 총 이동 거리만 540km 이상, 운전 시간만 6시간 반이 넘는 강행군이었지만 그랜드캐니언은 그 피로를 충분히 보상해 줬습니다.
그랜드캐니언 사우스림 — 겨울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구간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은 콜로라도 강을 기준으로 북쪽의 노스림(North Rim)과 남쪽의 사우스림(South Rim)으로 나뉩니다. 노스림은 적설량이 많아 매년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중순까지 출입이 통제됩니다. 동계 방문이라면 사우스림이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저희는 페이지 시티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접근해 데저트 뷰 드라이브(Desert View Drive)의 동쪽 입구(East Entrance Station)로 진입했습니다. 연간 패스를 미리 구매해 뒀기 때문에 입장료 없이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사우스림 관람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성수기에는 개인 차량의 허밋츠레스트 루트(Hermits Rest Route) 진입이 제한되고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합니다. 동계에는 개인 차량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캠핑카를 타고 각 뷰포인트를 직접 이동하며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뷰포인트 주차장에는 RV 전용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데저트 뷰에서 매더포인트까지 — 동쪽에서 서쪽으로
동쪽 입구로 진입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데저트 뷰 와치타워(Desert View Watchtower)입니다. 건축가 메리 콜터(Mary Colter)가 1932년에 설계한 7층 높이의 석탑으로, 탑 위에서 바라보는 그랜드캐니언 동쪽 전경과 콜로라도 강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탑 진입은 무료이며 내부에는 나바호 원주민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데저트 뷰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 그랜드캐니언 방문자 센터(Grand Canyon Visitor Center)가 나옵니다. 방문자 센터 뒤편의 매더포인트(Mather Point)는 사우스림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전망 포인트로, 그랜드캐니언의 웅장함을 처음 마주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왜 이곳에 '그랜드(Grand)'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또 찾는지 매더포인트에 서는 순간 단번에 이해가 됐습니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었습니다. 방문자 센터에서 페니 프레스로 기념 동전도 빠짐없이 만들었습니다.
방문자 센터에서 도보로 약 1.1km 거리의 림 트레일(Rim Trail)을 따라 야바파이 지질박물관(Yavapai Geology Museum)까지 걸었습니다. 1928년 건립된 역사적 건물로, 1990년 미국 국가사적지로 등록됐습니다. 파노라마 창 아래에 각 암석층을 설명하는 전시물이 배치되어 있어 눈앞의 협곡을 지질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내부 중앙의 대형 조각 지형도는 캐니언 전체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입장은 무료입니다.

방문자 센터에서 만난 엘크 — 말만 한 사슴
방문자 센터 구역을 걷다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만났습니다. 엘크(Elk)라고 불리는 대형 사슴이 관광객들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던 일반 사슴이나 고라니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로, 거의 말에 가까운 체구였습니다. 아이들도 다른 관광객들도 모두 신기해하며 졸졸 따라다녔지만 엘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여유롭게 이동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에는 엘크 외에도 캘리포니아 콘도르, 뮬 디어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합니다. 귀가 길고 꼬리 끝이 검은 뮬 디어는 실제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 한가운데에서 만났습니다. 앞차가 급정거하는 상황이었는데, 야생동물이 도로에 출몰하는 경우가 국립공원 구간에서는 드물지 않게 발생하므로 항상 주의가 필요합니다.

허밋츠레스트 루트 — 서쪽 끝까지
방문자 센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허밋츠레스트 루트(Hermits Rest Route)는 총 8개의 뷰포인트를 지나 허밋츠레스트(Hermits Rest)까지 이어지는 편도 약 11km 구간입니다. 마리코파 포인트(Maricopa Point), 파월 포인트(Powell Point), 호피 포인트(Hopi Point), 모하비 포인트(Mohave Point), 더 어비스(The Abyss), 모뉴먼트 크릭 비스타(Monument Creek Vista), 피마 포인트(Pima Point), 허밋츠레스트 순서로 이어집니다. 저희는 거의 모든 포인트에 들러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어느 포인트에서 찍어도 한 장 한 장이 그림 같았고, 포인트마다 보이는 각도와 협곡의 형태가 미묘하게 달라 같은 곳을 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중 피마 포인트(Pima Point)는 콜로라도 강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로 유독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들과 그랜드캐니언 — 억지로 내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둘째와 셋째는 캠핑카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각 포인트마다 억지로 데리고 나오는 대신, 따라 내리고 싶은 아이만 함께 감상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큰아들은 꽤 여러 포인트에서 함께 내려 멋진 풍경을 함께 봤고, 두 꼬맹이는 캠핑카 안에서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의 여행 흥미를 억지로 끌어내려다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습니다. 선택권을 주고, 따라오는 만큼만 함께 즐기는 방식이 52일 장기 여행에서 아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으로 산 그랜드캐니언 500피스 퍼즐을 꺼내 온 가족이 함께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퍼즐은 결국 52일 여행이 끝날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습니다.